메스헤티 튀르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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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스헤티 튀르크인은 자신들을 오스만 제국 정착민의 후손이라고 여기는 민족 집단으로, 주로 조지아의 메스헤티 지역에 거주했다. 이들은 터키어의 카르스 방언을 사용하며 수니파 하나피 학파를 따르지만, 조지아 역사학계에서는 16세기부터 1829년까지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 있던 메스헤티인들이 터키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유전적으로 조지아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1944년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1989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폭동으로 인해 많은 수가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튀르키예 등으로 흩어졌다.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설이 존재하며, 현재는 주로 수니파 무슬림이며, 동부 아나톨리아 방언을 사용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자신들이 오스만 정착민의 후손이라고 여긴다.[24] 조지아 측 역사학계는 전통적으로 터키어의 카르스 방언을 사용하고 수니파 하나피 학파에 속하는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16세기에서 1829년 사이에 터키화된 메스헤티인(조지아인의 민족학적 하위 집단)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기간 동안 삼츠헤-자바헤티 (역사적 메스헤티)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조지아 역사학자들의 이러한 이론은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유전적으로 조지아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로 뒷받침된다.[25][26]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1944년 11월 25일, 요시프 스탈린의 명령으로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했다. 가축 운반차로 강제 이주된 12만 명 중 1만 명이 사망했다.[93] 이들은 대부분 튀르크인이었지만, 카라칼파크인, 쿠르드인, 헴신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이슬람교로 개종한 조지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2. 명칭
그러나 러시아 인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카자노프 교수는 조지아 측 주장에 반대하며, 이 집단의 민족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아자리와 비교하며 아자리는 이슬람으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아어뿐만 아니라 조지아 전통 문화와 정체성까지 어느 정도 유지했지만,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전통 문화는 조지아적 요소가 일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 문화와 유사했다고 주장했다.[25] 미하일로비치는 아자리와 메스헤티 지역이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터키계 아르메니아 작가 세반 니샤니안은 아자리아인들이 조지아어를 보존한 반면, 메스헤티인들이 조지아어를 잃어버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자리아 방언을 사용하는 무슬림 조지아인인 아자리인들은 1810년대까지 조지아에 속해 있었고 직간접적으로 기독교 지배를 받았지만, 아흐스카(샤브샤트-유수페리, 포소프)의 사람들은 450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고, 오랫동안 터키어를 사용했으며, 아마도 오스만 이슬람의 다른 요소들과 얽혀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27] DNA 증거는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유전적으로 조지아인과 매우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조지아 측 주장을 뒷받침한다.[28]
인류학자 캐서린 톰린슨은 1944년 메스헤티 튀르크인 추방에 관한 소련 문서에서 이 공동체가 단순히 "터키인"으로 불렸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그들의 종교가 이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지아의 모든 무슬림도 터키인으로 불렸고, "메스헤티 튀르크인"이라는 용어는 그들이 우즈베키스탄에서 두 번째 추방된 후에야 만들어졌다.[29] 로널드 윅스만에 따르면 "메스헤티"라는 용어는 1950년대 후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30]
실제로,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대다수는 자신들을 단순히 "터키인" 또는 "아흐스칸 튀르크인"(Ahıska Türkleritr)이라고 부르며, "아흐스카 지역의 터키인"을 의미한다. 메스헤티인들은 때때로 조지아의 중세 쿠만인-킵차크인(조지아의 킵차크인)이 자신들의 조상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31] 하지만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는 킵차크인의 일부가 몽골의 침공 동안 조지아를 떠났고, 다른 일부는 몽골인에 합류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다.
3. 기원 및 정체성
DNA 샘플 검사 결과, 메스헤티 튀르크인에게 가장 흔한 Y 염색체 하플로그룹은 하플로그룹 J이며, 두 번째로 흔한 Y 염색체 하플로그룹 G이다.[22] 이들은 유전적으로 조지아인과 매우 가깝다.[23]
1944년 메스헤티 튀르크인 추방에 관한 소련 문서에서 이들은 단순히 "터키인"으로 불렸다. 인류학자 캐서린 톰린슨은 종교가 이슬람이었기 때문에 조지아의 모든 무슬림도 터키인으로 불렸으며, "메스헤티 튀르크인"이라는 용어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두 번째 추방된 후에야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29] 로널드 윅스만에 따르면 "메스헤티"라는 용어는 1950년대 후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30]
대다수 메스헤티 튀르크인은 자신들을 "터키인" 또는 "아흐스칸 튀르크인"(Ahıska Türkleritr)이라고 부르며, 이는 "아흐스카 지역의 터키인"을 의미한다.
3. 1. 오스만 기원설
대부분의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자신들이 오스만 정착민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24] 그러나 조지아 지지 사학계는 이들이 16세기에서 1829년 사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삼츠헤-자바헤티(역사적 메스헤티) 지역에서 터키화된 메스헤티인(조지아인의 민족학적 하위 집단)이라고 주장한다.[25][26] 이들은 터키어의 카르스 방언을 사용하고 수니파 하나피 학파에 속한다. 조지아 역사가들은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유전적으로 조지아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러시아 인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카자노프 교수는 조지아 측 주장에 반대하며, 아자리와 비교하여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민족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자리는 이슬람으로 개종했음에도 조지아어와 조지아 전통 문화 및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전통 문화는 조지아적 요소가 일부 있음에도 터키 문화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25]
터키계 아르메니아 작가 세반 니샤니안은 아자리아인들이 조지아어를 보존한 반면, 메스헤티인들이 조지아어를 잃어버린 이유에 대해 아자리아는 1810년대까지 조지아에 속해 기독교 지배를 받았지만, 아흐스카(메스헤티)는 450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 오랫동안 터키어를 사용하고 오스만 이슬람의 다른 요소들과 얽혀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27]
DNA 증거는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유전적으로 조지아인과 매우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며 조지아 측 주장을 뒷받침한다.[28]
인류학자 캐서린 톰린슨은 1944년 메스헤티 튀르크인 추방에 관한 소련 문서에서 이들이 단순히 "터키인"으로 불렸다고 지적했다. 이는 그들의 종교가 이슬람이었기 때문이며, 조지아의 모든 무슬림도 터키인으로 불렸고, "메스헤티 튀르크인"이라는 용어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두 번째 추방된 후에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29] 로널드 윅스만에 따르면 "메스헤티"라는 용어는 1950년대 후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30]
실제로 대다수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은 자신들을 "터키인" 또는 "아흐스칸 튀르크인"(Ahıska Türkleritr)이라고 부르며, 이는 "아흐스카 지역의 터키인"을 의미한다. 메스헤티인들은 때때로 조지아의 중세 쿠만인-킵차크인(조지아의 킵차크인)이 자신들의 조상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31] 역사가들은 킵차크인의 일부가 몽골의 침공 동안 조지아를 떠났고, 다른 일부는 몽골인에 합류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3. 2. 조지아 기원설
대부분의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자신들이 오스만 정착민의 후손이라고 여긴다.[24] 조지아 지지 사학계는 전통적으로 터키어의 카르스 방언을 사용하고 수니파 하나피 학파에 속하는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16세기에서 1829년 사이에 터키화된 메스헤티인(조지아인의 민족학적 하위 집단)이라고 주장해왔는데, 이 기간 동안 삼츠헤-자바헤티 (역사적 메스헤티)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조지아 역사가들의 이러한 이론은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유전적으로 조지아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로 뒷받침된다.[25][26] 그러나 러시아 인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카자노프 교수는 조지아 지지 서술에 반대하며, 이들의 민족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슬림 조지아 집단인 아자리와 비교하며, 아자리는 이슬람으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아어뿐만 아니라 조지아 전통 문화와 정체성까지 어느 정도 유지했지만,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전통 문화는 조지아적 요소가 일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 문화와 유사했다고 주장했다.[25]
그러나 미하일로비치는 이러한 비교를 할 때, 아자리와 메스헤티 지역이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을 무시하고 있다. 터키계 아르메니아 작가 세반 니샤니안은 아자리아인들이 조지아어를 보존한 반면, 메스헤티인들이 조지아어를 잃어버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자리아인들은 1810년대까지 조지아에 속해 있었고 직, 간접적인 기독교 지배를 받았지만, 아흐스카(메스헤티)인들은 450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랫동안 터키어를 사용했고, 아마도 오스만 이슬람의 다른 요소들과 얽혀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27]
DNA 증거는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유전적으로 조지아인과 매우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조지아의 주장을 뒷받침한다.[28]
인류학자 캐서린 톰린슨은 1944년 메스헤티 튀르크인 추방에 관한 소련 문서에서 이 공동체가 단순히 "터키인"으로 불렸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그들의 종교가 이슬람이었기 때문이며, 그들뿐만 아니라 조지아의 모든 무슬림도 터키인으로 불렸고, "메스헤티 튀르크인"이라는 용어는 그들이 우즈베키스탄에서 두 번째 추방된 후에야 만들어졌다.[29] 로널드 윅스만에 따르면 "메스헤티"라는 용어는 1950년대 후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30] 실제로,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대다수는 자신들을 단순히 "터키인" 또는 "아흐스칸 튀르크인"(Ahıska Türkleritr)이라고 부르며, "아흐스카 지역의 터키인"을 의미하는 지역을 지칭한다. 메스헤티인들은 때때로 조지아의 중세 쿠만인-킵차크인(조지아의 킵차크인)이 자신들의 조상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31]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는 킵차크인의 일부가 몽골의 침공 동안 조지아를 떠났고, 다른 일부는 몽골인에 합류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다.
3. 3. 킵차크 기원설 (소수설)
조지아 역사학계의 주류 학설과는 달리, 일부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자신들이 중세 쿠만인-킵차크인(조지아의 킵차크인)의 후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31] 그러나 역사가들은 몽골의 침공 당시 킵차크인의 일부가 조지아를 떠났고, 다른 일부는 몽골인에 합류했기 때문에 이는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4. 역사
1989년 6월,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계곡에서 글라스노스트 기간 동안 고조되던 민족 간의 긴장으로 인해 페르가나 사건이 발생하여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포그롬의 대상이 되었다.[93] 이 사건으로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1990년대 조지아는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거주를 받아들였지만, 삼츠헤-자바헤티주에서 아르메니아인과의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 또한 메스헤티 튀르크인을 받아들였으나,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온 피난민 문제로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는 못했다. 터키는 메스헤티 튀르크인을 받아들이는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200명 정도만 수용하고 실패했다.
소련 붕괴 이후,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러시아 연방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지만, 크라스노다르 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법적 지위가 불분명하여 무국적 상태로 남기도 했다.[94] 이들은 지역 코사크와의 긴장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95] 2004년부터 2007년까지 국제 이주 기구는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을 미국으로 이주시키는 캠페인을 진행하여 약 11,500명이 러시아를 떠났다.
4. 1. 오스만 제국 시대
아마시아 조약(1555년)에 따라 메스헤티는 동부는 사파비 왕조, 서부는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어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32] 1578년, 오스만 제국은 코카서스에서 사파비 왕조의 영토를 공격하여 1578-1590년 오스만-사파비 전쟁을 일으켰고, 1582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메스헤티의 동부(사파비 왕조)를 점령했다.[32] 사파비 왕조는 17세기 초에 메스헤티 동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32] 그러나 주하브 조약(1639년)에 따라 메스헤티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란의 지역 재탈환 시도는 종식되었다.[32]
4. 2. 소련 시대
1926년 그루지야 SSR 내 메스헤티 튀르크인 분포 지역은 와 같았다.
소련 시대에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큰 시련을 겪었다. 1944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으로 115,000명이 넘는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33] 이 과정에서 30,000명에서 5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주림, 갈증, 추위 등으로 사망했다.[35][34]
1989년 소련 인구 조사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에 106,000명, 카자흐스탄에 50,000명, 키르기스스탄에 21,000명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이 거주했다.[33] 소련 정부는 1968년이 되어서야 메스헤티 튀르크인 강제 이주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20] 이는 당시 소련이 터키에 대한 압박 작전을 준비하면서, 전략적 요충지인 조지아-터키 국경 지역에 거주하던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소련에 적대적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20]
1970년 4월, 메스헤티 튀르크 민족 운동 지도자들은 터키로 이주를 시도했지만, 소련 정부는 이들을 체포했다.[36] 1989년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메스헤티 튀르크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에 폭동이 발생하여 수백 명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고, 수천 명이 망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33]
4. 2. 1. 1944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1944년 11월 15일, 소련 공산당 이오시프 스탈린은 115,000명이 넘는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을 고향에서 강제 이주시키라고 명령했다.[33] 이들은 비밀리에 집에서 쫓겨나 기차에 실려 이동했다.[34] 강제 이주민 중 30,000명에서 5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주림, 갈증, 추위, 그리고 강제 이주와 망명 생활의 고통으로 사망했다.[35][34] 소련 경비병들은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을 광대한 지역의 철도 변두리에 버렸고, 종종 음식, 물, 쉼터도 없이 방치했다.
1989년 소련 인구 조사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에 106,000명, 카자흐스탄에 50,000명, 키르기스스탄에 21,000명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이 거주했다.[33]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강제 이주된 다른 민족들과 달리, 메스헤티 튀르크인 강제 이주의 이유는 1968년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20] 1968년에야 소련 정부는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강제 이주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 이유는 1944년에 소련이 터키에 대한 압박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0] 1945년 6월,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모스크바 주재 터키 대사에게 아나톨리아의 3개 주(카르스, 아르다한, 아르트빈)를 터키가 소련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20] 모스크바는 또한 다른 여러 아나톨리아 지역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주장을 지지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터키와의 전쟁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정착해 있던 전략적 요충지인 조지아-터키 국경 지역을 정리하고자 했다. 이들은 소련의 그러한 의도에 적대적일 가능성이 높았다.[20]
다른 강제 이주된 무슬림 집단과 달리, 메스헤티인들은 재활되지 못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1970년 4월, 메스헤티 튀르크 민족 운동의 지도자들은 소련 정부가 그들의 메스헤티 재정착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터키 시민으로서 터키로 이주할 수 있도록 모스크바 주재 터키 대사관에 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 메스헤티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36]
1944년 11월 25일, 요시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했다. 가축 운반차로 강제 이주된 12만 명 중 1만 명이 사망했다.[93]
4. 2. 2. 1989년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추방
1989년,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메스헤티 튀르크인과 토착 우즈베크인 사이에 폭동이 일어났다.[33] 과밀 지역인 페르가나 계곡에서 자원을 놓고 우즈베크인과 경쟁했던 메스헤티인에 대한 민족주의적 불만이 폭발했다. 수백 명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으며, 약 1,000채의 재산이 파괴되었고 수천 명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이 망명했다.[33]
1989년 6월,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 계곡( Fergana Valley)에서 글라스노스트 기간 동안 고조되던 민족 간의 긴장의 결과, 군중이 메스헤티 튀르크인을 대상으로 한 포그롬(Fergana Olayları|페르가나 사건tr)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대다수인 약 7만 명이 아제르바이잔으로 갔고, 나머지는 러시아의 다양한 지역(특히 크라스노다르 지방),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33][37] 및 우크라이나로 갔다.
4. 3. 소련 붕괴 이후
1989년 6월,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계곡에서 글라스노스트 기간 동안 고조되던 민족 간의 긴장으로 인해 페르가나 사건이 발생하여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포그롬의 대상이 되었다.[93] 이 사건으로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1990년대 조지아는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거주를 받아들였지만, 삼츠헤-자바헤티주에서 아르메니아인과의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 또한 메스헤티 튀르크인을 받아들였으나,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온 피난민과의 문제로 인해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는 못했다. 터키는 메스헤티 튀르크인을 받아들이는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200명 정도만 수용하고 실패했다.
소련 붕괴 이후,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러시아 연방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지만, 크라스노다르 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법적 지위가 불분명하여 무국적 상태로 남기도 했다.[94] 이들은 지역 코사크와의 긴장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95] 2004년부터 2007년까지 국제 이주 기구는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을 미국으로 이주시키는 캠페인을 진행하여, 약 11,500명이 러시아를 떠났다.
4. 3. 1. 호잘리 학살 (1992)
중앙아시아에서 박해를 받은 메스헤티 튀르크 난민들은 아제르바이잔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1992년 아제르바이잔인들과 함께 학살되기 전 나고르노-카라바흐의 호잘리에 정착했다.[38] 토마스 드 발에 따르면, 호잘리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 정부의 대규모 재정착 프로그램의 중심지였다.[39]
러시아 언론인 빅토리아 이블레바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호잘리 주민들의 시신이 흩어져 있는 마을 거리를 촬영했다.[40] 그녀는 아르메니아 민병대에 붙잡힌 호잘리 출신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을 묘사했으며, 메스헤티 튀르크 여성과 네 명의 아이들을 돕다가 아르메니아 군인에게 맞았는데, 아이들 중 한 명은 부상을 입었고 다른 한 명은 갓 태어난 아이였다.[41]
4. 3. 2.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14~)
2014년 5월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정부군과 친러시아 분리주의자 간의 전투로 인해 약 2,000명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이 집에서 쫓겨났다. 동부 도시 도네츠크의 메스헤티 튀르크 공동체 대표 네비칸 바사토프는 피난한 사람들이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 및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았다고 말했다.[21] 동부 우크라이나의 튀르키예어 사용 소수 민족 출신 메스헤티 튀르크인 300명 이상이 튀르키예 동부 에르진잔 주에 도착하여 튀르키예의 최근 망명 조치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42]
5. 인구 분포
1989년 소련 인구 조사에 따르면, 소련에는 207,502명의 튀르크인이 거주하고 있었다.[1] 그러나 소련 당국은 많은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을 "아제르바이잔인",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우즈베크인"과 같은 다른 민족으로 기록했다.[1] 따라서 공식적인 인구 조사는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실제 인구를 반드시 정확하게 반영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2009년 아제르바이잔 인구 조사에 따르면, 38,000명의 튀르크인이 이 나라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 인구 조사에서는 메스헤티 튀르크인과 아제르바이잔 시민이 된 터키 출신 튀르크인을 구별하지 않으며, 두 그룹 모두 공식 인구 조사에서 "튀르크인" 또는 "아제르바이잔인"으로 분류된다.[43] 유엔 난민 기구가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에는 100,000명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해체된 바쿠 평화 민주주의 연구소는 2001년에 90,000명에서 110,000명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고 있다고 밝혔다.[45][44] 학술적 추정치에서도 아제르바이잔의 터키 메스헤티 공동체가 90,000명에서 110,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45]
최근에는 러시아, 특히 크라스노다르에 거주하는 일부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이 현지 주민들로부터 적대감을 겪고 있다. 크라스노다르 메스헤티 튀르크인들은 시민권 박탈을 포함하여 심각한 인권 침해를 겪고 있다. 그들은 시민, 정치 및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재산 소유 및 고용이 금지되어 있다.[46] 따라서 2004년 이후 많은 튀르크인들이 난민 자격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오하이오주 데이턴에는 1,300명에 가까운 많은 수가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조지아로의 완전한 귀환이 금지되어 있다.[47] 조지아에서는 신념의 차이와 민족적 긴장으로 인해 메스헤티 튀르크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여전히 만연하다.[48]
6. 문화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문화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동부 아나톨리아 방언의 터키어를 사용하며, 수니파 무슬림이 다수이다.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결혼 풍습은 신랑 측 부모의 청혼으로 시작되며, 신부 측이 승낙하면 약혼 파티인 ''니샨''이 열린다. 결혼식은 이틀에 걸쳐 진행되며, 신부는 남편 집에 들어가기 전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 남성 할례 의식 또한 춤, 음악, 코란 낭독과 함께 성대하게 치러진다.
6. 1. 종교
대부분의 메스헤티 튀르크인은 수니파 무슬림이며, 소수는 시아파 무슬림이다.[11][12]6. 2. 언어
메스헤티 튀르크인은 동부 아나톨리아 방언의 터키어를 사용하며, 이는 카르스, 아르다한, 아르트빈 지역에서 유래되었다.[49] 튀르크 메스헤티 방언은 러시아 및 소련 통치 기간 동안 접촉했던 아제르바이잔어, 조지아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러시아어, 우즈베크어 등 다른 언어의 영향도 받았다.[50]6. 3. 결혼

메스헤티 튀르크인의 결혼은 신랑 측 부모의 전통적인 청혼으로 시작되며, 신부 측 부모가 이 청혼을 받아들이면 약혼 파티, 즉 ''니샨''이 열린다. ''니샨''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샤르바트''라는 의례용 단 음료를 제공한다. 실제 결혼식은 이틀 동안 진행된다. 첫째 날에는 신부가 집을 떠나고, 둘째 날 결혼이 성사된다. 신부는 남편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 뒤꿈치로 두 개의 접시를 발로 깨고, 현관에 꿀을 바른다. 이 전통은 새로운 신부와 신랑의 결혼 생활에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결혼식 마지막에는 남녀가 따로 춤을 추는 댄스 타임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신혼 부부가 '왈츠'라고 불리는 마지막 춤을 추면서 결혼식이 마무리된다.[51]
6. 4. 할례
아흐스카 튀르크인의 남성 할례 의식은 춤, 음악, 손님, 코란 낭독, 그리고 특별한 '''키르베'''(산덱)와 함께 성대하게 치러진다.[52]7. 저명한 인물
- Sima Ağayevaaz, 아제르바이잔 예술가
- 파티흐 아흐스칼리, 튀르키예 음악가[53]
- 타네르 아캄, 튀르키예 역사학자[54]
- 젤랄 알, 튀르키예 배우, ''부활: 에르투으룰''과 ''쿠르루쉬: 오스만'' 출연[55]
- Osman Server Atabektr, 튀르키예 정치인[56]
- 아슬란 아템, 튀르키예 레슬러[57]
- 테브피크 아리프, 카자흐스탄-튀르키예 억만장자, 부동산 개발자이자 미국 거주 투자자[58][59]
- 레피크 아리프, 카자흐스탄 사업가
- Fuat Azgurtr, 튀르키예 시인[60]
- 이스겐데르 아즈나우로프, 우즈베키스탄 출신 아제르바이잔 국민 영웅,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참전[61][62][63]
- 오무르베크 바바노프, 키르기스탄 억만장자이자 정치인, 키르기스탄 총리 역임(2011-2012)[64]
- 유수프 르자 베이, 오스만 제국 군인, ''테슈킬라트-이 마흐수사'' 특수 부대 소속
- Ali Sami Boyartr, 튀르키예 화가이자 박물학자
- Erdoğan Çakıcıtr, 튀르키예 배우[65]
- Adil Əfəndiyev (tərcüməçi)az, 아제르바이잔 문학 평론가[66][81]
- 아타 데미레르, 튀르키예 영화 제작자이자 코미디언[67][68]
- Şəfiqə Əfəndizadəaz, 아제르바이잔 최초의 여성 언론인, 교육자, 작가 및 자선가[69][70][81]
- Muharrem Ergintr, 튀르키예 언어학자이자 튀르크학자[71]
- Cabbar Faiqovaz, 아제르바이잔 군의관
- Aşıq Feydayiaz, 아제르바이잔 ''아쉬크''
- Əbdürrəhman Güləhmədovaz, 아제르바이잔 과학자
- Xalis Güləhmədovaz, 아제르바이잔 과학자
- Asif Hacılıaz, 아제르바이잔 문학 평론가
- Ahıskalı Ali Haydartr, 변호사이자 신비주의자
- 니아즈 일리아소프, 러시아 유도 선수; 2018년 및 2019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메달리스트
- 엘비라 카마로글루, 우크라이나 출생 튀르키예 여성 레슬러[72]
- Тахир Вейсалович Кападзеru, 우즈베키스탄 축구 코치
- 티무르 카파제, 우즈베키스탄 축구 선수[73]
- 한단 무사오글루 카사, TBMM TV의 튀르키예 사회자[74]
- 메디하 카이라, 오스만-튀르키예 작가이자 교사[75]
- 아부베키르 쿠르슈모프, 러시아 건축가이자 KavkazStroyGrupp 건설 회사 소유주[76]
- 몰브루드 미라리에프, 우즈베키스탄 출생 아제르바이잔 유도 선수[77][78]
- 묵타르 묵타로프, 카자흐스탄 축구 선수
- 바흐람 무자페르, 우즈베키스탄 권투 선수[79]
- 오메르 파이크 네만자데, 아제르바이잔 언론인[80][81]
- Мамедов, Минур Иса оглыru, 독일-소련 전쟁 중 러시아 전쟁 영웅[82]
- 엠라흐 오르마노글루, 우크라이나 출생 튀르키예 자유형 레슬러[83]
- 파티흐 오스만르, 카자흐스탄 출생 배우, 튀르키예 시대극 ''쿠르루쉬: 오스만'' 출연[84]
- 부으라 으네르, 튀르키예 프로 권투 선수[85]
- 알프투으 으네르, 튀르키예 프로 권투 선수[86]
- 퀴네이트 으즈데미르, 튀르키예 언론인[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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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일 술레이마노프, 우즈베키스탄 배우, 카피라이터 및 영화 감독[89]
- 라빌 타기르, 카자흐스탄 출생 튀르키예 축구 선수[90]
- 프랏 타니쉬, 튀르키예 배우[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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